만약 패션 디자이너를 꿈꾼다면 패션 일러스트레이션을 그리는 것에 익숙해져야 한다.
실제로 옷을 만들기 전에 그 옷이 어떨 것인지 미리 확인하고 소통할 수 있는 '시안'의 개념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여러 패션디자이너들의 실제 일러스트레이션을 접하다 보면 의문이 생긴다.
"사실적으로 그리는 게 아니라
자기 스타일대로 일종의 예술작품같이 그리는 일러스트레이션은
정보 전달이 아닌 다른 역할이 있는 것 아닐까?"
그것에 답하기 위해 패션 일러스트레이션이 가지는 역할을 알아봐야겠다.
이 그림은 기원전 1400년 경의 이집트 벽화이다. 놀랍게도 3500년 전 인류의 문명이 발생했을 때부터 옷을 입고 있는 그림을 발견할 수 있다. 우리는 이것을 통해 당시에 신분과 성별에 따라 어떻게 다른 옷을 입었는지 알 수 있지만 이 그림은 옷의 스타일을 보여주기 위함은 아니다. 그 점에서 패션 일러스트는 단순히 문화의 기록에 동반되는 것이 아닌 옷 자체를 보여주기 위함의 목적이 있어야 패션 일러스트라고 할 수 있겠다.
스타일을 보여주기 위한 가이드의 형태로 처음 등장한 것은 17세기 유럽의 "Fashion Plate"라고 하는 출판물에서부터이다. 15세기부터 시작된 대항해 시대의 결과로 다양한 문화권의 의상이 소개되었고 이국풍이 유행을 하기도 하면서 기존에 사회계층별 적절한 복장이었던 것을 삽화로 출판하여 일종의 패션의 기본형을 제시하였다.
여기까지도 아직 유행을 위한 패션으로서의 일러스트는 아니지만 옷을 보여주는 것이 목적이 된 것은 알 수 있다.
18세기가 되면서 의류산업은 산업혁명으로 늘어난 생산성을 바탕으로 더욱 활성화된다. 따라서 주 고객층이었던 상류층에게 Fashion Doll 이라는 인체의 1/3로 축소된 샘플을 보냄으로써 쉽게 의상을 주문할 수 있게 했다. 그러나 상업과 유통의 발달로 중산층이 성장하면서 더 이상 패션은 상류층의 전유물이 아니었고 회사 입장에서도 만드는 데 오래 걸리고 수량이 제한적인 Fashion Doll보다 더 저렴하게 많은 사람에게 전달할 수 있는 Fashion Plate 더 나아가 Fashion Magazine을 발간하게 된다. 이렇게 패션 정기 간행물 및 저널이 증가하면서 사람들은 신문과 같이 빠른 속도로 유행에 대해서 받아들이게 됐고 유럽의 패션은 더욱 빠르게 발전하게 됐다.
1858년에 Charles Frederick Worth가 오트 쿠튀르의 세계를 열면서 패션하우스들은 디자이너가 드레이핑을 하기 전에 협력하는 일러스트레이터를 고용한다. 그들은 고객에게 옷의 디자인을 보여주기 위해 삽화를 활용했고 따라서 형태와 디테일의 정확성이 중요하면서 그림에 있어 일종의 관습과 지침이 있었다고 한다.Fashion Magazine에서도 좀 더 정확하게 옷을 보여주기 위해 두 명 이상의 인물을 등장시켜서 측면과 후면을 보여줄 수 있도록 어떤 상황을 묘사하는 그림으로 변화했다. 정면을 주로 보여주던 기존의 기록 목적의 그림과 크게 달라진 부분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19세기 대량 인쇄기의 발명으로 풀 컬러 인쇄가 보편화되었다.
20세기가 되자 드디어 현대적인 의미의 패션 일러스트레이션이 꽃을 피우기 시작했다. Paul Iribe는 "Pochoir"라는 새로운 스텐실 기법을 활용하여 왼쪽과 같이 깔끔한 그래픽라인으로 예술성이 높은 일러스트를 완성하면서 20세기 초를 풍미한 Art Deco(아르데코)스타일로 주목을 받았다. 프랑스 잡지 Gazette du Bon Ton은 당시의 젊은 예술성 있는 일러스트레이터들을 데리고 Art Deco운동의 일환으로 예술적인 일러스트를 출간했다.
미국에서는 대중 패션잡지로 Vogue와 Harper's Bazaar가 현대 의류의 트렌드뿐만 아니라 사회문화를 다루면서 인기를 누렸는데 Vogue의 표지는 1910년부터 제2차 세계 대전이 발발할 때까지 항상 삽화를 선보였다.
그러나 19세기 중반 사진의 발명 이후 20세기의 추가적인 사진과 인쇄의 개발은 사진의 복사본이 잡지에 들어가도록 했고 점차 대중들의 사진의 선호도가 올라갔다. 따라서 일러스트레이션은 잡지 속 지면으로 강등되며 지속적으로 쇠퇴했다. 그러나 동시에 사진의 활성화는 일러스트레이터들이 옷에 대한 정확한 묘사를 할 필요에서 해방시키면서 오른쪽 그림과 같은 더욱 예술적인 스타일이 등장했다.
1980년대에 이르러 개성적인 스타일을 가진 일러스트레이터들은 다시 주목을 받으며 사진이 전달하기 어려운 강렬한 인상을 기사나 광고 캠페인에서 보여줬다. 패션하우스에서는 이런 일러스트레이터와의 작업을 통해 브랜드 이미지를 형성하기도 했다.
20세기 후반부터는 컴퓨터 디자인 프로그램의 출현으로 컴퓨터 기반 드로잉이 가능해지면서 새로운 방식의 예술적 패션 일러스트레이션이 등장했고 21세기에 들어서면서 이전의 20세기 초반보다 더 큰 일러스트레이션 붐이 일었다. 인터넷과 소셜미디어의 대중화로 디지털 방식의 일러스트레이션은 큰 인기를 얻으며 여러 패션브랜드뿐만 아니라 다양한 분야에서 협업을 통해 상업디자인의 큰 축으로 자리 잡았다.
2020년대를 넘어가면서 SNS는 전 세계인의 일상에 자리 잡았다. 위와 같이 2D와 3D를 조합하는 등 패션 일러스트를 다양한 방식의 창의적인 아트워크로 표현하는 것이 SNS에서 인기를 끌기도 하며 점점 확장되어가고 있다.
이처럼 '패션 일러스트레이션'의 목적은 사실적 묘사에서 예술적 표현으로 변화했다.
따라서 처음의 질문인 "사실적으로 그리는 게 아니라 자기 스타일대로 일종의 예술작품같이 그리는 일러스트레이션은 정보 전달이 아닌 다른 역할이 있는 것 아닐까?"에는 두 가지 대답을 할 수 있다.
- 패션일러스트레이션은 예술적인 목적을 위해서라면 사실적인 묘사를 신경 쓸 필요가 없다.
- 만약 사실적인 묘사가 필요한 경우 패션 일러스트레이션이지만 정보 전달에 목적을 가질 수도 있고 그것을 "패션 스케치", "도식화"라고도 부를 수 있겠다.
즉, 의도에 따라 두 가지 목적으로 다 가능한 것이며 우리가 접하는 패션 브랜드의 일러스트들은 주로 예술적인 목적이 강하기 때문에 일반 대중은 개성 있는 일러스트에 더욱 많이 노출되는 것이다.
다음에는 실제로 패션 브랜드에서 이 두가지 목적으로 어떻게 다른 그림이 사용되는지 알아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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